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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잔인하다?

허슬똑띠 2025. 6. 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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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드리는 말씀

오늘의 주제는 희망의 이중성에 대한 것입니다.
희망의 양면성과 그 현실적 활용, 그리고 삶에서의 적용 방안을 다양한 각도로 사례와 함께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들어가는 말

희망은 잔인하다? 희망은 선하다? 희망이 갖는 이중적인 속성과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희망은 잔인하다.”
이 말이 처음 들렸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희망을 언제나 '좋은 것'으로 배워오지 않았던가. 불가능해 보여도, 참고 견디고 버티게 해주는 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빛. 그런데 그 희망이 잔인하다고?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말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꽤나 현실적인 통찰이다.


1. 판도라의 상자, 마지막에 남은 '희망'이라는 재앙

희망의 잔인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고전적인 비유가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다.

신들의 명령으로 세상에 내려온 판도라. 그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버린 상자에는 온갖 질병, 고통, 불행, 배신 같은 재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이 재앙들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상자의 맨 아래에는 딱 하나,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은 갈린다.

한쪽은 말한다. "희망은 인간이 절망하지 않도록 주어진 선물이다."

또 다른 쪽은 말한다. "희망은 마지막까지 인간을 붙잡아 고통을 지속시키는 또 다른 재앙이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때론 스스로를 지옥 속에 가두기도 한다. 잔인하리만큼 질긴 미련과 집착. 그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때도 많다.

2. 희망은 왜 ‘좋은 것’처럼 보이는가?

희망이란 도구는 강력하다. 무엇보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어떤 기업은 직원들에게 “우리 함께 미래를 바꾸자.”고 말한다. 어떤 정치인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외친다. 어떤 종교는 “죽은 뒤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들은 모두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희망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가?이다.

예컨대, 기업은 직원들이 더 열정적으로 일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린 성장할 수 있어, 조금만 더 노력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으면, 피로감과 허탈감은 오롯이 직원의 몫이다.
희망은 이렇게 ‘동기부여’라는 명목 아래, 때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한 희망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유도된 희망은, 잔인한 기대감일 수 있다.


3. 그래도 우리는 희망 없이 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 그럼 희망 같은 거 다 버리고 현실만 직시하며 살자!”고 외칠 수 있을까?

그 또한 아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절실하다.
의미 없는 시련 앞에서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상상의 가능성’이 없다면 우리는 쉽게 무너진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
그 이유는 곧, ‘희망’이다.

4. 이중적인 희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희망을 지나치게 긍정하거나, 완전히 부정하는 건 모두 극단이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희망을 도구로서 사용해야 한다.

첫째, ‘가능성’과 ‘환상’을 구분하라.

희망은 ‘가능성’ 위에 있어야 한다. 현실과 전혀 무관한 희망은 환상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가수의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단지 노래방 1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데뷔를 꿈꾸는 건 환상이다. 반면, 매일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업계 구조를 분석하고, 자신의 성장과정에 객관성을 갖춘다면, 그건 ‘현실 가능한 희망’이 된다.

둘째, 희망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길 바란다”는 희망은 타인에게 조종당하기 좋은 상태다.
스스로의 행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은 성장의 기회가 되지만, 외부 요인에 기대는 희망은 자기 책임을 외면하게 만든다.

셋째, 희망은 ‘계산’해야 할 감정이다.

희망은 무작정 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철수’도 고려할 줄 아는 감정이다.
비즈니스에서 실패를 직감했는데, “그래도 한 번만 더 버텨보자”는 말로 시간과 자금을 더 잃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희망이 아니라 합리적인 손절 타이밍을 잡는 것이 더 현명하다.

5. 현실 속 사례 – ‘희망이 독이 된 경우’와 ‘힘이 된 경우’

사례 1: 스타트업 창업자 김민수 씨의 이야기

김민수 씨는 3년 동안 적자를 내고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을 품었다. 주변에서 “지금 철수하는 게 맞다”는 조언에도, 그는 ‘성공 신화’만을 꿈꾸며 버텼다. 결국 빚만 남기고 사업은 폐업됐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이 있다.
“희망이 아니라, 착각이었다.”

사례 2: 암 투병 중인 한 여성의 회복기

반면, 어떤 여성은 암 선고를 받고도 “난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어”라는 희망으로 식습관과 생활을 바꾸고, 투병 과정을 기록하며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녀에게 희망은 고통을 줄인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살아갈 이유’로 바꾸어준 열쇠였다.

6. 희망의 진짜 의미는 ‘기대’가 아니라 ‘태도’다



희망을 우리는 종종 ‘기대’로 착각한다.
“잘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은 행운을 기대하는 희망이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은 ‘잘 안 돼도 버티겠다’는 태도에서 나온다.

진짜 희망은 이렇게 말한다.
“가능성은 작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망할 수도 있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 책임을 지겠다.”

이러한 희망은 더 이상 나를 속이거나 이용하지 않는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며, 각오이며, 성장이다.

끝 맺는 말

희망은 두 얼굴을 가졌다, 그걸 인정하자.

희망은 때로 사람을 속이고, 착취하며, 고통을 연장시키는 마법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만든다.
희망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한 발을 내딛게 만드는 유일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부정하거나, 맹신할 것이 아니라,
그 이중성을 인정하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희망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희망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 희망이 나의 것이어야 하고, 현실을 무시하지 않아야 하며, 그 희망으로 인해 삶이 더 나아져야 한다.

그럴 때 희망은 비로소,
잔인한 기대가 아니라, 온전한 삶의 태도가 된다.

그런데 기억해두면 좋은 말.
어떤 식의 말이든 정답이 아니다. 자신이 절실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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