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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테크

재계에서 퇴출된 기업들의 쇄락 패턴

by 허슬똑띠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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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요인이 기업을 무너뜨렸을까?

 

과거에 한때 시장을 석권하며 잘 나가던 기업들이 갖가지 이유로 재계에서 사라졌다. 쇠퇴한 기업들은 무리한 사업 확장이나 동업 결렬, 집안싸움이나 세무사찰 등 그 원인도 다양하다. 어떤 원인이 기업을 무너뜨렸는지 알아보며 투자 등을 위해 관심을 기우리고 있는 기업(또는 그룹)이 있다면 그런 징조 여부가 감지되고 있는 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사라진 케이스


1945년 10월 사탕 · 캐러멜 등의 생산업체인 해태제과합명회사로 출발하여 성장한 해태제과그룹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과다한 채무로 쓰러진 예다. 해태제과는 산하에 15개 계열사와 1만 4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1996년 말 자산 3조4천억 원, 매출 2조7천억 원의 재계 서열 24위의 탄탄한 회사였다. 그러나 주력 사업인 제과와 음료 부문 외에 유업, 관광업, 중공업, 전자통신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회사가 기울기 시작했다. 전자 사업이 대기업 간의 경쟁에서 패하고 중공업에서 계속 적자를 내면서 결국 모체인 해태제과까지 무너진 케이스다.

1924년 10월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한 진천양조상회로 출발한 진로는 장학엽이 창업하였다. 1985년 2세 경영인 장진호가 회장으로 취임한 뒤로 1987년 진로종합유통을 설립하였고, 1992년 미국의 쿠어스사가 50:50 비율로 합작한 진로쿠어스맥주를 설립하는 등 줄기차게 사업을 확장해갔다. 이에 따라 1996년 진로그룹은 산하에 24개의 방계 및 계열회사를 거느린 대한민국의 제계 순위 24위로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 확장과 1997년 4월 21일 외환위기로 인하여, 부도유예협약을 처음으로 적용받았으나 1997년 9월에 부도를 냈다. 이렇게 주업종인 소주에서 맥주, 유통, 건설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제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명한 진로소주는 하이트맥주에 매각되어 하이트진로로 그 이름을 연명하고 있다.

이외에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근에 되어 재계에서 사라진 주요 중견 그룹으로는 쌍방울(199년 부도후 범정관리를 통해 회생), 거평(1998년 부도 후 해체), 나산(1998년 부도 후 해체), 동아(2000년 부도 후 2001년 헤체) 등이 있다.

집안 싸움으로 망한 케이스


집안의 분란으로 쇠퇴한 경우도 있다.
1960~1970년대 합판의 대명사였던 동명목재는 1960년대 미군에 납품하던 합판이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미국, 유럽, 중동 등에 수출이 급증하여 1965년 매출액 50억 원에서 1979년에는 1000억 원에 달하는 등 사세가 최고조에 달했다, 절정의 시기인 1979년 초에 2게 경영으로 넘어가면서 사업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2세 경영자와 어머니 사이의 불화로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회사 재산을 빼돌리면서 사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창업자 강석진회장이 다시 복귀하여 회사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그해 8월에 부도를 내면서 동명목재는 끝내 도산하고 말았다.

게맛살로 유명한 오양수산도 가족 간의 재산권 다툼으로 경쟁사인 사조로 회사 경영권이 넘어갔다. 김성수가 창업한 오양수산은 맏아들 김명환 부회장과 경영 관련해서 갈등을 빚었다. 김 부회장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김 부회장을 제외한 사주 일가는 김성수 회장 사망 하루 전 경쟁사였던 사조산업에게 경영권이 포함된 김회장 소유 주식을 127억에 매매하였다.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경쟁업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극단의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김부회장이 어머니를 상대로 39억원 상당의 채권반환 청구 소송을 냈을 때 김 회장이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그 단편적인 사유를 알 수 있다. 현재 사조오양이란 이름으로 옛 명맥을 잇고 있다.

동업 해소로 자진 퇴출한 경우


동업형태로 승승장구 하던 기업이 각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동업형태의 그룹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개성 출신 이정림, 정호 형제과 역시 개성 출신의 이회림, 경북 출신의 이용준이 동업으로 세운 개풍그룹은 1960년대 중반까지 5대 재벌 안에 들 정도였으나 이들이 각각 갈라서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955년 4월 유안 비료와 양곡 등을 수입할 목적으로 대한농산이 설립되었다. 설립시 박용학과 이상순은 농산물 수입업을, 최호는 밀가루 수입을, 최성모는 부산에서 된장과 고추장 등을 군납을 하고 있었으며, 어윤일은 밀가루 장사 등의 유통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힘을 합치면서 삼화빌딩의 5인조 활약이 시작되었다. 삼화빌딩 5인조라는 별명은 삼화빌딩(서울 소공동 소재)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붙여진 것이다. 이들 모두 이북 출신의 기업가로 상호 협력의 파트너십을 발휘하여 재벌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각자 분가한 뒤로는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박용학은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주축으로 대농으로 개편하면서 사업을 넓혔다. 이상순은 천일곡산과 원풍산업으로 최성모는 신동아화재와 동아제분, 삼풍건설로, 최호는 천부광업으로 어윤일은 사울약품으로 독립하였다.

정치적 이유와 세무 사찰로 패망한 경우


목포가 연고인 삼학주조는 1960년대 소주 시장을 석권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 출신의 김대중 후보에게 박빙의 승리를 거둔 후 삼학의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대선 후 삼학은 세무 사찰을 받게 되었고 납세 증지 위조로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사장이 구속되고 주조시설이 공매 처분되면서 그대로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라진 대기업그룹이 있다. KBS2의 전신인 동양방송을 국유화 한 사건 만큼이나 떠들썩했다. 동양방송은 삼성그룹이 소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부산에서 고무신 공장을 시작으로 재게 서열 7위, 수출 3위에 오르기도 했던 국제그룹은 하루아침에 해체되었다. 연합철강, 동서증권 등 20여개 계열사와 전 세계 40여개 해외 지사를 거느린 국제그룹이 무너진 표면적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 방만한 경영과 무리한 기업 확장, 둘째, 과도한 단기자금 의존, 셋째, 해외공장의 부실이다. 또한 사위들에게 경영을 맡겨 이들 간의 경쟁과 그룹 내 파벌까지 생기는 등 친족경영으로 인한 내분이 심화되었다는 것 등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거대 그룹의 도산을 정당화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 해체 결정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침해한 것이라며 위헌 판결을 내렸고 의혹은 풀렸다. 경제적 파탄에 의한 그룹 해체가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의한 정치적 개입이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소문도 무성했다. 5공화국 당시 양정모 회장이 일해재단 모금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984년 12월 폭설로 청와대 만찬에 늦어 밉보였다. 부산 지역 상공인 대표 시절 1985년 12월 총선에서 부산 지역 선거에 참패하자 괘씸죄로 총선 직후 공중분해 시켰다는 등의 말이 돌았다. 어째든 경제 원리에 위한 퇴출이 아닌 정치적 사유로 인한 매우 억울한 퇴장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5공 시절 탁월한 아이디어로 한국 레저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명성그룹도 사업이 승승장구하던 때 권력층의 돈줄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세무 당국이 세무 사찰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김철호회장은 주요 일간지에 ‘강호제현에게 알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국세청의 세무사찰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폭로성 성명을 발표하야 국세청을 자극하였다. 국세청은 조사 인원을 50명에서 100명으로 증원하였고 결국은 세금포탈 등이 포착되어 수사가 확대되었다. 수사결과 명성의 급성장 배경에는 비리를 동조한 이들이 있음이 드러났다. 구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혜화동지점의 김동겸대리가 불법적인 자금관리를, 당시 교통부장관이 인허가 과정에서 도움을,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이 국토 이용 정보 등을 제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결국 회사는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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