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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과 열정 DREAM

전혜린 평전

by 허슬똑띠 2022.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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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자기 고뇌 속에 살다간

'비 내리는 하늘과 커피가 어울리는 여성’의 짧은 삶

 

 

“세코날 마흔알을 흰 걸로 구했어!”

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 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몹시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 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 이호철 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참고) 세코날은 세코날세코바르비탈의 상품명인 수면제로서 흰색과 분홍색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에 손쉽게 구득할 수 있었다.

 

전혜린은 죽기 바로 전날 세코날을 40알을 구했다고 한다. 그것도 흰색으로. 그런데 전혜린을 따라 죽음을 택했던, 나의 영어 과외교사 제이슨은 빨간 색이 더 좋았다고 한다. 아니 그 당시 그는 흰색도 있는지를 몰랐고 약사가 건네주는 빨간색 세코날이 참으로 예쁘게 보였는지 모른다. 혹시 하얀색이 없어서 빨간색을 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제이슨이 시키는 대로 삼촌이 먹을 약이라면서 서너 군데 약국을 돌며 30개가 넘는 약을 사다 주었다. 아무런 이유도 모르는 채.

 

소음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 담배를 피우면서도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맣게 끼여 있고, 누군가는 그 불결한 손톱을 "검은 테가 둘러진 부고(訃告)"라고 일컬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 독일 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 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과용으로 인한 사고 사였는지, 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 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전혜린은 평남 순천에서 1934년 1월 1일에 전봉덕(田鳳德)의 8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일제 식민지의 악랄한 수탈에 모두들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에 혜린은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원피스를 입었다. 그의 부친은 혜린이 서너 살 때부터 한글 책과 일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쳤다.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 때문에 그의 부모는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神)이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나를 무제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범용함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전혜린이 보여준 처절한 고투(苦鬪)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언제나 극점(極點)을 추구하는 전혜린의 정신은 범속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견뎌했고, 언제나 "미칠 것 같은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갈망했던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병"이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 과목 성적은 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과락이 있는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 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 과목의 0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던 문리대에서 오든 이나 엘리엇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盜講)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 그리고 온갖 종류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전혜린이 ‘비 내리는 하늘과 커피가 어울리는 여성인 것 같다.’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한 잔의 흰 포도주를 앞에 놓고 오랫동안 노을이 비치는 - 노란빛, 붉은 빛, 보랏빛, 회색, 엷은 먹빛으로 점점 옮겨져 가는 참으로 긴 긴 노을이었다. - 산봉우리들을 쉬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그림처럼 둥근 레몬 달이 내 눈 앞 흰 봉우리 위에 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지구 아닌 다른 별 속에 혼자 와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내가 말할 수도 없이 조그만 미립자로서 별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았고 자연이 기이하고도 위대하고도 정답게, 마치 동화 속 거인같이 느껴졌다. 이 처절한 빛을 띠고 있는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빙산의 끝없는 대양과 그 위에 걸려 있는 영원한 램프-달을 바라볼 때 나는 빙하시대와 우리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며 기술의 어떤 발달과 지성의 어떤 훈련에도 불구하고 필경은 우리와 자연과의 인식이 아니라 숭배와 감동, 따라서 겸허와 경건의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었다."

 

(사족)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는 쉽지 않았던 교육과 해외유학을 한 여성으로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은 지성인답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측면에서는 방탕한 젊은 날을 보낸 거 아니냐고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고와 철학은 그녀에게는 운명이었고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는지 모르지요. 사람마다 제각기의 평가가 다 맞거나 혹은 다 틀리다고 할 수 없는 그녀는, 많은 천재들이 그러했듯이 특이한 짧은 삶을 마감했기에 더 아쉬운 건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사후 한참 뒤 그녀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서적을 읽고 난 후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라고 그녀가 한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 나름 그녀를 이해했기에 그녀를 기리며 이글을 씁니다.

 

참고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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