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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테크

대우그룹의 흥망성쇠

by 허슬똑띠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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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과 김우중

 

대우그룹과 창업자 김우중 전회장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대우를 꺼내는 것은 그룹은 분해되었어도 대우라는 이름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며 대우의 생사과정을 분석해보면서 시대 흐름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과 경영논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기 좋았던 개발년도의 기업스토리가 지금에는 맞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창업해서 성공하는 과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 그 이후 창업해서 엄청난 기업을 이룬 네이버, 카카오나 JY 그리고 SM 등 엔터테인먼트기업 나아가 지금도 창업에 뛰어들어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스타트기업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나이

 

대우그룹의 창업과 번개보다 빠른 듯했던 성장은, 창업자 김우중 개인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 가를 보여준 극명한 예이다. 김우중은 1936년에 대구에서 대구사범학교 교사였던 김용하의 4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도 잘 한 그는 명문 경기중 ·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한국전쟁 중에 부친이 납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주경야독하며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1960년 9월에 한성실업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1963년 국내 최초로 트리코트(tricot)지를 수출한 무역업체였는데, 이것이 김우중과 찰떡 인연이었다. 김우중은 ‘트리코트 김’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각지를 누비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가진 탁월한 능력 중에서도 마케팅의 달인임을 증명하는 일화이다.

 

대우그룹의 태동

 

여기에서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을까? 1966년에 한성실업을 퇴사한 그는 1967년에 자본금 500만 원의 대우실업을 설립한다. 설립 이후 김우중은 샘플 원단을 들고 동남아시아로 출장을 떠났다. 그가 근무했던 회사의 시장이었다. 트리코트지는 동남아시아에서 셔츠, 슬립 및 팬티, 파자마 등 내의류 원단으로 사용되어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출장 1주일 만에 싱가포르 등지에서 나일론 트리코트지와 폴리에스테르 트리코트지 30만 달러를 수주하는 등 설립 첫해인 1967년에만 38만 달러를 수출했는데, 당시 비교적 큰 수출업체들의 연간 수출액이 100만 달러 내외였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수출 금융을 이용해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스웨터, 완구, 가발, 자전거 등으로 수출 상품을 다변화하면서 해외 시장 개척에 노력을 경주한 결과 인도네시아 시장을 새로 확보했다. 이때까지 대우가 수출하는 트리코트지는 싱가포르를 통해 인도네시아에 재수출되었는데,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인도네시아로 직수출할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우의 트리코트 원단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설립 이듬해인 1968년에는 수출액 292만 달러로 그해 수출의 날에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68년에 하청업체인 수일섬유와 한양상가의 설비 일체를 현물 출자 받아 수출 경쟁력이 제고되어 이윤이 배 이상 늘어나는 등 호황을 누렸다. 1969년에는 미국 시어즈 로벅(Sears Roebuck)과 J. C. 페니(J, C, Penny) 등을 바이어로 확보하면서 세계 최대의 섬유시장인 미국에도 진출해서 창업 5년만인 1972년에 수출 5300만 달러를 기록, 자본금 115억 원의 국내 최대 섬유 수추 기업으로 부상했다.

 

다각화 추진

 

 

대우의 다각화 작업은 1969년 새창직물과 1970년 동남섬유의 인수부터 비롯되었다. 1972년에는 고려피혁을, 1973년에는 쌍미섬유와 신성통상을 인수해서 섬유 무역 부문의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수평 다각화에도 주력해서 1973년 6월에는 동국정밀을, 9월에는 동양증권을 각각 인수했다. 또한 같은 해 5월에 미국계 페이퍼컴퍼니인 한국투자를 인수해서 ‘동양투자금융’으로 재발족하고, 8월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서 ‘대우건설’로 개명했으며, 12월에는 동남전기와 서울퇴계로 입구의 삼주빌딩을 LG그룹으로부터 인수했다.

 

이 무렵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서울역 앞 교통빌딩의 인수였다. 교통빌딩은 1968년 양동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철도청에서 착공한 지상 23층, 지하 2층의 초대형 건물이었는데, 1971년 11월에 5층까지 건축한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정부는 1972년 10월에 관광공사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워커힐호텔, 영빈관과 함께 건설 중인 교통빌딩을 함께 매각했는데, 워커힐호텔은 SK에 영빈관은 삼성그룹에 각각 매각되었으며, 대우는 삼주빌딩 처분과 1973년에 기업공개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교통빌딩을 인수했다. 또한 1975년에는 대우실업이 종합 무역상사로 지정되어 산하에 고려피혁, 쌍미섬유,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투자금융,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무려 10개 계열사를 거느려 대우그룹을 완성하게 되었다.

 

자동차 기계, 조선 등 중공업 분야로 확대

 

한편 대우는 1976년에 신진그룹으로부터 한국기계를 인수해 중화학 공업에도 진출했다. 한국기계는 해방 직후 적산기업으로 정부가 관리하다가 1968년에 신진자동차가 인수해서 국내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및 산업기기류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신진그룹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실화되어 한국기계는 산업은행의 관리 하에 있다가 대우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인수 당시 한국기계의 자본금은 대우그룹 전체 자본금을 합친 것보다 2배 이상이나 컸는데 대우는 이를 ‘대우중공업’으로 개명했다.

 

1977년에는 제철화학을, 1978년에는 새한자동차로 개명한 신진자동차를 각각 인수했다. 신진자동차는 1960년대까지 국내 자동차시장의 50퍼센트 이상을 점유한 한국 자동차공업의 선두 주자로서 1972년에 GM과 50대 50으로 합작, GM코리아로 재발족하였으나, 1973년 제1차 석유파동과 1975년 현대자동차의 ‘포니’라는 국산 자동하 등장으로 타격을 받아 산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가 새한자동차로 개명되었다. 대우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해서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한 1978년 10월에는 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도 인수했다. 옥포조선소는 1973년 5월에 착공된 100만 톤급 초대형 산박을 건조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단일 도크시설로서, 인수 당시의 공사 진척도는 25퍼센트였다. 대우는 옥포조선소를 모체로 해서 자본금 70억 원의 ‘대우조선’으로 재발족하고 1981년 4월에 100만 톤급 제1도크를 완공했다.

 

이로써 대우실업은 산하에 섬유, 정밀, 금융은 물론 대우 본사 빌딩, 자동차, 조선, 중공업을 아우르는 국내 정상의 대기업 집단으로 도약했다. 양세 무역상으로 출발한 대우실업이 창업 10년 만에 삼성, 현대, LG그룹에 버금가는 최대 재벌로 부상함으로써 김우중 신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글로벌 경영 철학의 시동

 

이후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겠다는 김우중 전회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대우그룹의 글로벌 경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실 대우는 설립초기부터 섬유 수출로 해외시장을 개척해 나갔으며 남다른 해외 영업 능력을 발휘하여 성장해 왔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차별화된 전락으로 경쟁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미개척 시장을 타깃으로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 사회주의 국가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거나 설립하였다. 이어 인도와 중국까지도 사업영역을 확장하여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1993년도에는 공식적으로 세계 경영을 선언하면서 해외 시장 공략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세계 경영과 관련하여 김회장은 많은 일화도 남겼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5년 5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GM이 8년간 끈질기게 따라 다녔던 폴란드 최대 자동차 회사 FSO인수전에서 GM을 제치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FSO사장을 만나 15여 분만에 FSO인수에 성공했던 것은 유명하다.

 

공든 탑의 붕괴

 

그러나 문제는 대우그룹의 중심이 너무도 김우중 전 회장 개안에게 쏠려있었던 점, 그리고 부실회계 등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게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때문에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대우그룹은 1999년 IMF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대우그룹은 1999년 7월에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을 발표하였고, 대우그룹 채권금융기관들은 그해 8월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에 대해 워크아웃을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12개사의 채무상환은 11월까지 3개월간 유예되었다. 그러나 구조조정 일정을 준수하지 못함으로써 대우 계열이 채권 금융기관에 위임한 담보처분권을 행사하도록 한 구조조정 근거에 의해 담보처분은 현금화가 쉬운 자산으로부터 적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해외 부채 규모나 부실 회계 처리 문제 등이 부각되면서 대우그룹 구조조정 문제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우중회장의 건강문제가 터짐으로써 대우그룹은 같은 해 11월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제 대우그룹은 가고 없지만 곳곳에 자취는 남아있다. 이름을 아직까지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대우건설’ 그리고 미래에셋대우, 동부대우전자, 포스코대우(현 포스코인터내셔널), 대우조선해양(DSME) 등이 예전 대우의 빛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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