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대한 단상
우리가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호칭하게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선천적이건 전쟁이나 사고에 의한 후천적 장애이건 가리지 않고 그냥 병신이라고 불렀다. 한편으로 신체의 특정부위에 장애가 있으면 그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있었다. 귀의 경우 귀머거리(청각장애인), 눈의 경우 봉사(시각장애인), 말 못하는 경우 벙어리(언어장애인), 허리의 경우 꼽추(척추장애인)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구개열은 언청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어쩌면 장애 자체보다 이렇게 편협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심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멍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나아진 것은 호칭의 변화와 함께였다.
요즘 구개열 또는 구순열, 우리말로는 언청이란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해도 가끔 눈에 뛰던 안면기형증 환자였다. 그 당시는 쉽게 수술을 받지 못해 성인이 되도록 그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눈에 잘 띄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태어날 때 곧바로 수술을 해서 대부분 거의 완치된다고 한다.
구개열(구순열)은 선천적으로 입천장이 뚫려 코와 입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나 잇몸까지 갈라진 경우는 입천장갈림증이라고 한다. 구개열은 두경부(얼굴의 뇌와 안구를 제외한 부분)에 발생하는 선천성 태아 안면 기형 중에서 가장 많은 질환 중 하나이다. 구순구개열 환자 중 대략 50%에서는 입술갈림증과 입천장갈림증이 같이 발생하고, 20%에서는 입술갈림증이 단독으로 발생하며, 30%에서는 입천장갈림증이 단독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장애인이 있는 가정은 그 장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특히나 구개열환자의 경우 그 부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므로 당사자는 끝없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환자의 짧은 생애를 지켜보았던 사람이 쓴 가슴시리면서도 감동적인 논픽션 스토리를 소개한다. 주인공은 어린이를 구하다가 대신 숨진 어느 P공대생인데, 이 글은 그의 동생이 쓴 글이다. 긴 글이지만 읽어보시면 좋겠다. '우리형'이라는 영화도 형제간의 다툼과 의리를 다루고는 있으나 전반적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긴 글이지만 글이 주는 생동감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첨삭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업로드 한다.
제1화 버버리 형
월말의 은행창구는 참 붐빈다. 오늘은 선명회 후원 아동에게 후원금을 부치는 날이다. 그동안은 자동이체로 후원금을 냈었는데 지난달에 자동이체에서 지로로 바꿨다.
대기표를 받고서 북적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자동이체가 편하긴 하지만. 형도 나처럼 이렇게 지루해 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오늘에서야 나는 왜 형이 그 손쉬운 이체로 하지 않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한 달마다 꼬박꼬박 지로용지를 썼었는지 형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형은 언청이였다. 어려운 말로는 구개열이라고도 하는데 입천정이 벌어져서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의 한 종류였다. 세상에 태어난 형을 처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젖꼭지가 아니라 차갑고 아픈 주사바늘이었다. 형은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남들은 그리 쉽게 무는 어머니의 젖꼭지도 태어나고 몇날 며칠이나 지난 후에야 물 수 있었다.
형의 어렸을 때 별명은 방귀신이었다. 허구 헌날 밖에도 안 나오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하기는 밖에 나와봐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나 되기 일쑤였으니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형이 그저 집안에만 있어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형이 창피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형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비록 어렸을 때였으나 수술실로 형을 들여보내고 나서 수술실 밖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기도드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형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은근히 형에 대한 질투심이 들었다. 어머님이 그렇게 기도드리던 그 순간만큼은 저 안에서 수술 받고 있는 사람이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고 바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는 솔직히 나보다 형을 더 좋아했다. 가끔씩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서 항상 형은 착하고 순한 아이였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네를 태우면 형은 즐겁게 잘 탔었는데 너는 울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넘어지고 그랬지..."
형은 나보다 한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아침마다 어머니는 하얀 반창고를 형의 입술 위에다가 붙여 주시고는 했다. 나 같으면 그 꼴을 하고서는 창피해서 학교에 못갈 텐데 형은 아무 소리도 않고 매일 아침 등교 길에 올랐다. 형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고생께나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형에게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을 걱정해주기는 커녕 말할 때마다 버벅거린다고 버버리 라고 놀리고 그랬다. 형이라는 말 대신 버버리라고 불렀고 내 딴에는 그 말이 참 재미있는 말로 생각되었다.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는 무서워서 감히 버버리란 말을 못 썼지만 형하고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버버라 버버라 이렇게 부르곤 했다. 형은 공부를 잘했다.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하였다. 비록 한 학년 차이가 나긴 했지만 형의 성적표는 나보다 항상 조금 더 잘 나오곤 했다. 어쩌면 그런 형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서 더 그런 말을 쓰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형이 어머니에게 무진장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그 당시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참 만화와 오락에 빠져 있었는데 항상 용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밤 어머니의 지갑에서 몇 백 원씩을 슬쩍 하고는 했었는데 그러다 어느 날은 간 크게도 어머니의 지갑에서 오천 원이나 훔쳐서 (그 옛날 오천 원은 참 큰돈이었다) 텔레비전 위의 덮개 밑에 숨겨 두었는데 그게 그만 다음날 아침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당연히 나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다. 게다가 그 며칠 전부터 돈 문제로 고민하고 계셨던 어머니였던 지라 두려운 마음에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었다고 철저하게 잡아 땠다. 다음에 어머니는 형을 추궁했다. 형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 줄 몰라 했다.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염치없게도 형의 대답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 위기를 빠져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형은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믿었던 형이었기에 더욱더 화가 나셨고 나는 죽도록 어머니에게 매 맞고 있던 형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형이 그렇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니 철없던 내 마음에도 형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버리고서 방 한구석에 엎드려 있던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형은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후 얼마동안은 형에게 버버리라는 말도 안하고 고분고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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