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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놀라게한 무함마드 깐수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정체

by 허슬똑띠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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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one in life is gonna hurt you; you just have to figure out which people are worth the pain.
Erica Baican
인생에 있어 누구나가 당신에게 해를 가하려 할것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참아낼 가치가 있는 고통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에리카 바이 칸


무함마드 깐수 교수는1946년생
역사학자로,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어난 혼혈로 모국어는 아랍어이다. 원래 필리핀 국적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에 귀화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동아시아에 에로의 이슬 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으로 입국했다. 그해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
에서 공부하다가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고 1989년 9월 <신라
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
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교류사와 실크로드 학의 권위자
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80년대부터 KBS 3TV(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국내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 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매주 금요일(이슬람의 주일은 금요일이다. 대체로 무슬림 국가는 금요일
을 휴일로 지정한다.)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지만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아내는 서울
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이것이 1996년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깐수의 이력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진짜 정체는 중국 조선족 2세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이름, 나이, 국적, 종교, 출신지, 경력, 모국어, 구사 가능한 외국어, 학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96년 7월 22일 프레스센터 20층은 기자들의 발길로 분주했다. 안기부가 발표한 고정간첩 '무함마드 깐수'의 간첩 활동 증거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서 처용을 신라에 온 아랍인으로 풀이한 "신라서역교류사" 등 정력적인 연구 활동을 벌이던 필리핀 국적의 깐수가 간첩이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완연한 외국인으로 보이던 그가 순수 혈통의 한국 사람 (조선 사람) 정수일이었으며, 부인조차도 그를 필리핀 사람으로 알만큼 철저하게 주변을 속여 왔다는 데에서 기절초풍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력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입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그는 1934년 11월 만주국 지린성 허롱 (길림성 화룡, 1940년에 연길에 편입된 지역)에서 중국 조선족 2세로 태어나고 자랐다. 물론 정수일의 친부모는 모두 조선인(한국인)이었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주은래
(저우언라이) 총리가 인사담당관을 통해 자기 가문의 아가씨와 혼담을 주선하기도 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듯하다.
그는 평생 동양 언어 일곱 가지 즉 한국어,일본어,중국어,아랍어,페르시아어,말레이어,타갈로그어를 배웠고 러시아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스파니아어 등서양 언어 5가지를 익혔다고 토로한다. 과연 언어의 천재다.


그는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일했지만 중국인으로 살기에는 지나치게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조국은 북한이었지만 그곳에선 그에게 또 다른 형태의 충성을 요구했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조국은 그에게 스파이가 될 것을 명했고 정수일은 그를 충실히 받아들인다. 그는 신분을 세탁한 끝에 필리핀 사람 무하마드 깐수로 변신,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정보를 수집하여 북한으로 올려보내고 공작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성과는 높아가기만 했다. 그가 체포되자 "그로 하여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탄원까지 등장할만큼 동서 교류 문화사에서 그의 입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조국은 언어의 천재이자 둘도 없는 학자였을 그를 공작원으로 만들었고, 결국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에게 충성한 한 지식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북한의 정보일꾼들은 정수일로 하여금 보안이 철저하지 못한 팩시밀리로 정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고, 결국은 이 때문에 안기부에게 꼬리가 밟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그가 번역한 역작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저자 이븐 바투타에 비견될 만한 재능과 학식을 갖추었던 한 한국인 (현재의 국적이다.)의 운명이 그 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에게 소중하게 간직되기를 바란다. 이븐 바투타가 그러하였듯이.
(참고)
이븐 바투타는 유명한 여행 책자 가운데 하나인 <여행기>에 거의 모든 이슬람권 국가들과 중국 및 수마트라까지 약 12만㎞가 넘는 긴 여정을 기술했다.
그는 고향인 탕헤르에서 법률 및 문학에 관해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1325년 21세 때 메카 순례에 오르면서 그의 여행은 시작된다. 이책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그는(정수일) 2000년 특별사면되었으며
그뒤 2008년에는 전향하여 한국문명교류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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