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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테크

200년의 전통을 지닌 은행의 운명을 쥐락펴락한 은행원

by 허슬똑띠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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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스은행

 

자신에게 원하는 일을 하도록 베풀어준 은행과 이를 악으로 갚은 은행원

 

베어링스은행의 역사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은 1762년에 프란시스 베어링(Francis Baring)과 그의 형인 프레딕 베어링(Fredic Baring)(동업자 존이 있었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에 의하여 "존 앤 프란시스 베어링스 컴퍼니"(Fredic and Francis Barings Company)로 창업되었다. 그들은 독일 브레멘 출신이자, 엑시터(Exeter)에서 양모 무역을 하던 존 베어링의 아들들이었다. 회사는 처음에 칩사이드에 사무실을 두었다가 몇 년 후, 보다 중심지역인 민싱 레인으로 옮겼다. 베어링스는 점차 양모를 탈피하여 사업을 다각화였는데, 국제 무역의 급격한 성장에 필요한 재정 서비스를 공급하였다. 1774년,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1790년 경에는 그 사업을 크게 확장하였디.

 

1800년 프란시스는 은퇴하였고 회사는 “프란시스 베어링 앤 컴퍼니”로 재편되었다. 프란시스의 새로운 파트너는 그의 큰 아들 토마스(나중에 그는 토마스 베어링 경이 된다.)와 사위 찰스 월이었다. 베어링스는 1802년도에 미국이 프랑스한테 루이지애나를 사들일 때 중간에서 거래를 도맡아 할 정도로 자본금도 크고 국제적으로 신뢰도 또한 뛰어난 은행이었다. 게다가 여러 창작물에도 등장했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인물인 에드몽 당테스가 대출을 받던 곳이 베어링스 은행이었고,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이 내깃돈으로 걸었던 2만 파운드를 맡겼던 은행도 베어링스 은행이었을 정도다. 당시 영국 왕실도 고객으로 두고 있을 만큼 영국 왕실과 관계가 깊어, “여왕 폐하의 은행”(the "Queen's Bank")라고까지 불리었다. 영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은행이었다.

 

닉 리슨과 베어링스은행이 악연을 맺게 된 경위

닉 리슨은 당초 모건스탠리 분쟁팀 사무직으로 근무하면서 트레이더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기회가 닿아 1989년 베어링스 은행 결제부로 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1992년 싱가포르 지사로 발령 받음과 동시에 자기가 꿈에도 그리던 트레이더가 되게 된다. 즉, 자신이 꿈꾸던 선물 및 옵션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트레이더가 된 것이다. 이게 베어링스은행의 악수라면 악수였다.

 

오사카와 싱가포르 거래소에선 모두 닛케이 225 선물을 취급했는데 리슨은 두 거래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한 지수 차익거래로 이익을 얻는 매매를 구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싱가포르 거래소는 전산매매가 아닌 사람이 직접 수신호로 매매를 진행했기에 매매 실수가 많이 일어났는데 이런 매매 오류는 회사가 손실을 부담해 주었다. 그래서 딜러들은 회사가 관리하는 에러 계좌란 곳에 손실을 기록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매매를 진행하던 리슨도 매매를 망쳐 2만 파운드(현재 약 5천여만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리슨은 본사에 보고하기엔 큰 손실이라 생각해서 원래 에러 계좌가 아닌 다른 에러 계좌에 이 손실을 숨기게 되는데 이것이 88888 계좌이다.

 

88888 계좌의 악몽

그런데 리슨은 88888 계좌를 이용하는데 중독되어 다른 손실 모두 이 계좌로 숨기기 시작했다. 1992년 말 2백만 파운드로 늘어난 손실은 1994년 5억 1200만 파운드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리슨은 장부와 대차대조표를 조작하여 본사에는 손실이 없는 척 눈속임을 하였고 사실을 알 리 없는 본사에선 그저 수익을 많이 내는 우수한 딜러라 생각하고 더 많은 돈의 관리를 맡기게 된다. 이후, 에러 계좌에는 손실로 인해 수시로 마진콜(증거금 추가납부)이 요구되고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증거금을 충당하기 위해 리슨은 닛케이 255 지수 옵션에 대해 스트래들 매도를 시도했다. 이게 참극의 서막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귀신처럼 다가온 파산의 그림자

그런데 스트래들 매도는 시장의 변동성이 작아야 하는데 당시 닛케이 255 지수의 변동성은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에 리슨은 2000만 파운드의 손실을 추가적으로 입게 된다. 1995년 1월 16일 리슨은 닛케이 지수가 하룻밤 사이 변동성이 적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스트래들 매도 포지션을 취했는데 고작 하루가 지난 1월 17일 고베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닛케이 지수는 대폭락하고 리슨은 이 시점에서 5,000만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니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닛케이 지수가 다시 원상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물 매수 포지션과 함께 20,000 계약이나 추가 매도를 하고 일본 국채선물마저 매도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떨어진 지수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고 국채선물마저 급등해버림에 따라 그는 그날 약 8억 2,700만 파운드(14억 달러)의 거대한 손실을 내게 된다.

 

닉이 발생시킨 14억 달러의 손실은 베어링스 은행 자기 자본의 약 2배 수준이었기에 베어링스는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영란은행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지원안을 마련해보았으나, 이미 너무 늦게 알아버렸기에 살릴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던 베어링스는 너무도 하무하게 망해버렸다. 이후, 네덜란드의 ING 그룹에 매각되었는데 매각 금액은 단돈 1파운드였다. 한때 여왕의 은행이라 불리던 은행이 한 직원의 무모한 영웅놀이에 의해 이렇게 몰락한 것이다. 당시 닉 리슨의 나이 만 28세였다.

 

리슨의 이후의 행적

이러한 참극이 일어나자 그동안의 모든 사기행각이 까발려졌기에 닉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포위망을 피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를 거쳐 도주를 했으나 결국 독일에서 체포되어 싱가포르로 송환되었고 6년 6개월이라는 생각보다 가벼운 징역을 선고받았다. 3년 6개월 만에 모범수로 석방하게 된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사기행각을 정리해서 '로그 트레이더'라는 자서전을 썼는데 이게 생각보다 많이 팔렸고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2000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로 나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리슨은 선물 거래의 위험성과 그 선물거래를 규제하는 시스템에 대한 부족을 직접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이그노벨상 경제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이럴 땐 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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