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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 테크

과거 콘도의 대명사였던 명성그룹 김철호회장과 이를 실질적으로 조정한 베일에 싸였던 은행원 이야기

by 허슬똑띠 2021.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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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실화이다.

한국 레저산업의 선구자이며, 기발한 사업가로 평가되기도 하는

명성그룹의 김철호회장은,

40여 년 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콘도사업으로,

리조트붐을 몰아,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가 일으킨 콘도라는 신개념 리조트 붐으로,

전국 땅값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김철호는 1966년도에 금강운수라는 택시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파산하면서 한동안 잠적하기도 했었는데,

다시 서울에서 명성관광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하여 부도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적이 좋지 않으니, 정상적인 은행의 대출거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런 위기를 넘기고, 명성그룹을 일구게 된 배경에는

베일에 싸여있던 어느 인물과 연계되면서였다.

1979년부터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하게 된 김철호는

65만 평 규모의 골프장인 명성컨트리클럽을 개장 ·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후 금강개발, 명성콘도미니엄, 남태평양레저타운을 비롯해

방대한 계열사들이 딸린

국내 최초 · 최대의 관광 · 레저전문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김철호회장이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 것은

모 은행 지점에 근무하던 은행원과 연계되면서부터이다.

1979년 4월 김철호는 부도 직전에 있던 명성관광이 발행한 어음의,

교환자금 부족액에 대한 연장결제 문제로

구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혜화동 지점의 김동겸이라는 은행원을 만나면서,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이후 4년여 동안 김대리는,

사채중개인을 통해 예금 형식을 빈 사채를 모집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인출해, 별도로 개설한 계좌에 입금시킨 후,

명성그룹 회장에게 융통해 주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해주었던 것이다.

김대리가 한 수법은 다음과 같다.

사채 중개인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사채 전주가,

예금자로서 1억 원을 맡기면,

수기통장에 1억 원을 그대로 기재해 내준다.

사채전주는 통장에 1억원이 적혀있으니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행 내부 원장에는 100만 원만을 기재한다.

그리고 차액 9900만 원은,

자신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계좌에 입금시킨다.

결과적으로 지점의 수신금액은,

사채전주가 가져온 1억원이 그대로 반영된다.

이와 함께 그는 거래신청서나 이자전표의 인감 란에,

예금주의 인장을 받아 날인하는 것은 물론,

주변 가깝게 둔 백지 예금청구서나 지급전표에도,

몰래 인장을 미리 찍어 놓는다.

이것들은, 필요할 때마다 인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김대리는 퇴근시간이 되면,

조성된 금액을 파악하고,

사채의 실세 이자와 은행의 정규 이자 간의 차액을 보전해주는 차원에서,

사채 중개인에게 선이자를 지급했다.

그리고 조성한 사채자금을 명성그룹 회장에게 건넬 때에는,

명성그룹 어음의 결제를 위해,

명성그룹 계열사 법인 계좌에 입금하는 방법을 썼다.

현 우리은행 전신인 한국상업은행 로고

그러나 국세청의 명성그룹 세무조사가 시작되어,

수기통장을 이용한 변칙적 사채자금 조달이 발각 나게 된다.

수기통장의 활용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은행들의 업무가 완전히 전산화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되어 있는 경우에도,

정전에 대비해 수기통장을 병용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는, 1993년부터 실시된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가명이나 차명 사채계좌거래가 가능했던 것이다.

상업은행은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출범하였다가

현재는 우리은행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아마도 당시 김대리는, 사채업자와 연계한 수신실적을 많이 쌓아서,

지점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나름 견제를 받지 않고,

일을 크게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일개 은행 대리가 수기통장을 통해,

은행 안에 자신만의 '사설은행'을 따로 차려 놓고,

무려 1000명이 넘는 전주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해서,

명성에 사채자금 1066억 원을 공급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실제로 24개 계열사를 거느린 신흥 재벌의,

주거래 은행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은행 속 개인은행을 운영하던 겁 없는 은행원은,

마음속으로 명성그룹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지 않았을까?

자기가 조달해준 자금으로 일구어진 그룹이었으니까.

세무조사로 인하여 사채를 이용한 돈놀이 행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지만,

만일 세무조사가 없었더라면,

그의 돈놀이는 그보다 더 오랜 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은행 내부통제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한 말이다.

그야말로, 아날로그 시대 은행의 허술한 실상이 가져온,

참사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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