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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 해양 표류기 (표해시말)

by 허슬똑띠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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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에 우이도에서 40km나 떨어진 대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은

소흑산도 유배생활 중에는

소흑산도에서 홍어장수로 생계를 잇던

문순득이라는 어부로부터 들은 표류기를 바탕으로

《표해시말》이라는 책을 남겼다.

표해시말에는 문순득이 조업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서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떠돌다가,

결국 마카오,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다.

그는 역사상 최장 거리, 최장 기간을 표류한 장본인이다.

그는 험난한 표류 여정 속에서도,

글을 몰라 글로 쓸 수는 없었지만

외국의 풍습과 문물 등을 유심히 관찰하여 기억하고,

외국의 언어와 문화를 빠르게 습득하였다.

표해시말에는

1800년대 조선의 한 상인이 호기심으로 바라본

외국의 생경스런 모습들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1802년 1월의 일이다.

문순득은 남해의 작은 섬

그것도 죄인들의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

우이도 사람으로

홍어를 팔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정처없이 표류했다.

그래도 운좋게 류큐섬에 닿게 되었다.

류큐에서 예상외로 대접을 잘 받으며 지내던 중

중국으로 가는 사신선이 출발하자

그 배에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필리핀 루손섬)에 표류하여

온갖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원주민으로부터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였고

어느 정도 그들의 말까지 배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입신양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돌아온 문순득을 맞이한 이가

권력과의 불화로 우이도에 유배와 있던

실학자 정약전이었다.

정약전은 한낱 홍어 장수에 불과하던 문순득의 표류담에 귀를 기울였고

그것을 손수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바로<표해시말>이다.

다만 원본은 못 찾고, 아우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를 통해

『유암총서』에 실림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진다.

당시의 류큐국의 언어와

여송국의 토착어 등을 문순득이 기억나는 대로 얘기하여

책의 말미에 기록했다.

그 당시의 류큐국 언어는

현 오끼나와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에

<표해시말>은 동아시아 문화교류 측면에서

지금까지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문순득이 표류하기 앞서

1801년에 여송인들이 제주에 표류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막가외, 막가외"라고만 외치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이 현 마카오라는 것도 몰랐다.

당시 루손과 마카오는 정기적으로 무역선이 다녔음으로

그들은 마카오로 보내주면 고향 필리핀으로 갈 수 있어

"막가외"라 부르짖었던 것인데,

9년이 지나서야 문순득이 만나서 여송국말로 통하여

그들이 여송국인들인지 알게 됨으로써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문순득은 한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인 셈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고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정약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인

<자산어보>의 저자로 유명하다.

정약용의 형으로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하고 있던

이벽 등과 교유하고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제로 조사 및 채집, 분류하여

각 종류별로 명칭과 분포, 형태, 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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