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1894년 11월 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었는데
러시아는 1896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한다.
당시 조선의 주변은 엄청나게 어수선한 시기였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의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이관파천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동아시아 삼개국 중 하나인 조선은
중국과 일본과 더불어 대관식에 초청을 받았다.
청나라에서는 이홍장을, 일본에서는 당시 이토히로부미의 라이벌이던
야마가타아리모토를 사절로 보냈다.
러시아가 삼개국에 초청장을 보낸 데에는 각각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먼저 청나라에서는 철도부설권를 따내고자 했고,
아관파천으로 가까워진 조선에게도 각종 이권을 얻어내고자 했다.
반면에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라
협상을 통해 러시아와 화친을 맺고자했던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민씨 정권의 측근이었던 민영환을
사절단 대표로 선정했는데, 민영환의 사절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영어통역관 윤치호, 중국어통역관 김득련(전형적인 조선사대부),
김도일 러시아통역관(러시아유민출신이며 우리말을 잘 몰랐다),
민영환의 몸종인 손희영 등이었는데
사절단의 면면을 보면 정치적 외교적인 고려 없이
그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듯
문화적, 지식 배경의 차이가 상당했던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사절단이 러시아로 파견되면서 미국과 유럽을 거친
세계일주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사절단 일행은 우선 제물포항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하이까지 갔다.
이날 저녁 생전 처음 서양음식을 접한 사절단은 이렇게 기록했다.
‘서양음식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입맛에 맞았다. 천이 깔린 긴 탁자에
식단이 펼쳐지는데 우유와 빵 , 국과 고기, 생선과 채소가 나왔고
칼과 포크, 숟가락과 접시가 나왔다. 제철도 아닌데도 진기한 과일이
쟁반에 가득했고 마무리로 나온 커피도 좋았다.‘
일행은 상하이를 거쳐 나가사키로 갔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거기서 몬트리올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다.
당시 뉴욕을 본 사절단은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뉴욕의 부유하고 화려함은 입으로 말하거나 붓으로 기술하기 어렵다.
뉴욕에서는 웨이터를 제외하고 모두가 빠르다.‘
이들은 다시 영국 상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횡단하고
동유럽의 바르샤바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국에
분할 점령당해 있던 시절이었다.
이를 보고 윤치호는 이렇게 한탄했다.
‘이것이 약한 나라의 운명이구나!
이 세 마리의 늑대에 갈가리 찢겨진 양처럼
세 이웃나라에 의해 분할되어버린 왕국을 보니 슬픔이 앞선다.’
이어 러시아에 도착하여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의 화려한 대관식에
참관하였다. 사절단 일행은 대관식을 앞두고 엄청나게 모여든
군중을 보고 놀랐다.
김득련은 새 황제의 행렬을 향해 ‘우라’를 외치는
군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라고 말했다.
민영환 일행은 곧 황제와 면담하고
그 자리에서 고종의 친서를 전했다.
대관식을 마친 후 각종 행사가 이어졌는데 러시아측에서
준비한 일정에는 연극관람, 무도회, 음악회, 관병식 등이 있었고
이때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사절단은 회고한다.
러시아의 궁궐과 처음 보는 장치들의 화려함이나
정밀함에 감탄하면서 조선에서 배울만한 점을 적기도 했다.
김득련은 행사장에서 본 광경을 보고 느낀 점을 기록했다.
‘눈깔이 이상한 색이지만 여인들의 눈 하나는 시원하다.
서양의 요조숙녀들은 어찌 그리 요란한 옷을 입을꼬?
내 얼굴이 잘 생겨서 일까?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을 몰라서 그럴까?
거침없이 군자의 옆자리에 다가와 수다를 떠는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 발레를 보고는 학을 떼기도 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기도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 가련한 낭자를 이리도 학대하다니
서양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구나!‘
이러한 말에서 그가 받은 문화적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관식에 참석하고 난 뒤 일행 중 윤치호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먼저 파리로 떠났고 나머지는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조선에 도착했다.
윤치호는 파리로 유학을 간 뒤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 지부티, 스리랑카,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 상하이를 거쳐 귀국하였는데
윤치호의 남방 여행노선을 더한다면
100여 년 전의 조선사절단 여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일주라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세계문물의 경험을
당시 조선의 서구문명화에 쓰이지 못하고
그냥 묻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국운이 쇄할 대로 쇠하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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